고기로 태어나서
🔖 나는 여기서 채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어떤 목표를 꿈꿔볼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맛있는 먹을거리뿐 아니라 동물의 살점으로서의 고기 역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회식 자리에서 육즙이 흐르는 삼겹살 한 점을 집어 들었을 때 당신과 고기 사이에 어떠한 환상도 남아 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 삐약 소리는 농장장이 사무실로 돌아간 다음에도, 우리가 발효기 주변을 청소하고 떨어진 병아리들을 주워 모아 집어넣은 다음에도, 계사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근무가 끝나고 식당으로 내려갈 때도 계속 들려왔다. 빌어먹을 삐약 소리는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마냥 도무지 멈추지를 않았는데 믿을지 모르겠지만 다음 날 새벽 계사로 올라갈 때도 발효기 안에서 울리는 병아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찰스 부코스키는 어디엔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있다고 썼다. 오히려 사람을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건 연달아 구두끈이 끊어지는 식의 '사소한' 불행의 연속 때문일 수 있다고 말이다. 그날 밤 나는 수만 개의 구두끈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 닭이나 돼지는 얼마든지 먹어도 좋지만 개만큼은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뭔가 하나만 특별히 여기는 것은 위선 아니냐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모든 일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역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이라도 관여할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당장 모두가 채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식량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고 생물학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인간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부터 고기가 되는 운명에서 구제하자는 주장이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이런저런 윤리나 논리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잔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야기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루에도 수십 톤의 음식 쓰레기를 쏟아내는 시대가 소비하는 고기의 양과 종류는 느는 게 아니라 줄어야 한다. 그것이 동물과 환경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합리적인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만일 인간이 계 속해서 동물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암이나 교통사고가 우리의 육체를 죽이기 전에 소화불량이 먼저 우리의 양심을 죽일지도 모를 일이다.
🔖 처음 동물을 죽일 때는 대상과 나 사이에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닭의 목이 끊어지는 순간 내 안에서도 뭔가가 죽는다. 그 닭은 깔짚 위가 아니라 내 몸속에서 몸부림을 친다. 날개를 흔들어 혈관과 내장을 들쑤셔놓고 발톱으로 뼈를 긁어댄다. 그것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작업이 계속되면 펄떡대는 닭이 점점 내 안에서 빠져나온다. 마침내 걸레를 쥐어짜는 정도의 부담감만을 지닌 채 닭 목을 비틀 때쯤 되면 닭은 내 발치에서 벌레처럼 꿈틀댄다. 내가 느끼는 닭의 죽음과 물질적인 닭의 죽음이 비로소 일치하게 된다. 그렇게 죽음은 닭 혼자만의 것이 된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였다. 병아리의 고통도, 돼지의 고통도, 개의 고통도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왜 내가 이걸 문제 삼았는지조차 기억하기 어려웠다. 그게 정상이고 그게 당연한거다. 물건은 그렇게 다루는 거다. 작업이 끝나고 내가 신경 썼던 것은 오직 얼얼한 팔의 피로뿐이었다.
🔖 마주 보고 있는 철창의 틈으로 개의 코와 앞발이 불쑥불쑥 삐져나와 있었다. 그런 케이지들이 산기슭까지, 내 눈에는 세상 끝까지라도 이어질 것처럼 늘어서 있었다.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 그 형태의 질서정연함 때문에 내가 시비를 걸고 있는 대상이 얼마나 견고한지가 피부에 와 닿았다. 그래서? 이 녀석한테 고기를 먹여서 기분이 나아지면 그다음엔 어떻게 하지? 또 그 옆에 있는 개는? 그 앞에 있는 개는? 사방에서 대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터져 나왔다. 그 혼돈의 오케스트라 한가운데서 나는 개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돌아서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